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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광양공>농암공휘동혁농암기(農菴公諱東爀農菴記)
농암공휘동혁농암기(農菴公諱東爀農菴記) 농암(農菴) 조동혁(趙東爀) 군은 어진 사람으로 곡성(谷城) 인지동(仁智洞: 山水洞)에 살고 있다. 글을 읽어 행실을 닦고 몸가짐을 깨끗하게 하며 스스로 선대(先代)의 일을 이어받아 명류(名流)를 사랑하고 학문을 쌓아 밝고 아름다운 대가(大家)를 이루고 있는데, 스스로 호(號)를 농암(農菴)이라고 하였다. 그가 나에게 사람을 보내 편지를 했는데 「농사는 천하의 큰 근본인데 내가 힘이 세니 농사를 지으면 一년치의 양식을 마련할 수가 있으며, 처자와 하인들이 있으니 손님이 오면 술을 가져오게 하여 술에 취하면 즐겁게 놀아 장차 늙어 가는 것을 잊게 될 것이며, 세상의 잘잘못이나 영욕(榮辱)은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기로 하여 호를 농암이라 하였습니다. 글을 잘하는 현인군자(賢人君子)의 글을 받아 이런 뜻을 밝혀 자손들이 보도록 하고자 하니, 그대가 한마디 써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그 편지를 보고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쓴다. 훌륭하도다, 그대의 뜻이여. 예로부터 청운(靑雲)에 뜻을 두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처음에는 농사를 지은 자들이 많았다. 선비가 가난하면 뜻을 굳게 세우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여야 하므로 농촌에서 책을 읽고 손발이 부르튼 가운데서 덕(德)을 닦아 부지런히 경륜(經綸)과 재능을 쌓았다가 벼슬하게 되면 은택을 천하에 베풀고 부귀를 누리고 한 세상을 번창하게 하여 만세에 이름을 날리기를 바랐지 농촌의 생활을 언제까지나 만족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군자(君子)는 때를 잘 만나면 편안하고 궁하거나 현달하거나 마음 쓰지 않았다. 이제 조 군은 가난하지만 분수를 지키고 농사를 직업으로 삼으면서 기뻐하고 스스로 즐기니, 참으로 군자가 아니겠는가. 또 조군의 선조 충헌공(忠獻公)은 고려 말엽을 당하여 절의를 지키면서 옥천(玉川)에 은거하여 호를 농은(農隱)이라고 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그대는 오래된 집안의 모범을 지켜 효성과 우애로 집안을 다스리고 아버지의 병환에 날마다 의원을 부르고 나중에는 의학(醫學)을 공부를 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의술은 옛날의 임금인 신농씨(神農氏)가 처음으로 발명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고대가 농암이라 호한 것이 어찌 농사나 지어 배불리 먹고 사는 데만 그치려는 것이랴. 선조(先祖)와 옛날의 성인(聖人)을 잘 계승하여 실추시키지 않고 그 평소 간직한 포부를 펴려고 한 유래가 오래인 것을 미루어 알 수 있겠다. 내 문장이 졸렬하여 그 포부를 잘 나타내지 못하고 이렇게만 써서 보내면서 휴일에 말을 타고 그대를 찾아가 농주(農酒)를 마시면서 농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오고 싶은데 그대는 이를 허락하려는가? 甲戌年 秋七月 既望 嘉善大夫漢城判尹 原任奎章閣直學士 驪興 閔景植 記子 尚勲 세움 여수시 신월동(新月洞) 명덕산(明德山)에서 여천군 화양면 창무리 비봉산으로 一九八七년 三월 十五일에 이장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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